2005/04/10

안녕, 모스크바 (Stars in the Morning Sky)


안녕, 모스크바 (Stars in the Morning Sky)
출연: 이원희, 신서진, 백향수, 김선영, 신지훈, 최홍일, 정의갑, 이도엽
원작: 알렉산드르 갈린
번역&연출: 김태훈
예술감독: 차태호
조연출: 박병수
연출부: 전은미, 정선화, 노은정
무대미술: 유영봉
의상: 장혜숙
조명: 신호
무대감독: 김은실
주최: 극단 지구연극 연구소(GTI)
기획: 문화아이콘
공연장소: 아룽구지 소극장

20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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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연극 연구소의 작품은 이것으로 두 번째로 접한다. 2001년 국립극장에서 안톤 체홉 페스티벌에서 <바냐 아저씨>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이라 그런지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일방적인 시선으로 비춰지는 것과는 색다른 느낌이 좋게 느껴진다. 특히 조명을 받으며 대사를 읊는 배우 외에 주변에 있는 다른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자그마한 재미를 준다.

<안녕, 모스크바>는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 올림픽이 시작하기 직전 거리의 부랑자나 매춘부 등을 모스크바 근교로 격리시켜 외국인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계획을 세운 후 이를 실행에 옮긴다. 여기 성화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조금 떨어진 임시 수용소에 매춘부와 정신이상자, 알코올 중독자가 모여있다.

임시 수용소의 관리인 발렌찌나(발야)는 강한 여성을 표상하며 수용소의 사람들을 매정하리만큼 차갑게 대한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 밤중에 기찻길로 나가 고함과도 같은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바람기 많고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정신병원에 보냈다. 아들 니꼴라이에 대해 집착에 가까우리 만큼 강한 사랑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들인 니꼴라이가 창녀인 마리아를 사랑해 아들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마리아를 미워한다. 하지만 극의 마지막에 발렌찌나는 그저 감시의 대상이었던 수용소의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발렌찌나의 아들인 니꼴라이는 경찰이지만 사랑하는 마리아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다.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마리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로 인해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한다. 성화가 지나가는 순간 초소를 비우고 다친 마리아를 위해 수용소에 돌아온다.

마리아는 기숙학교에서 남자와 동침했다는 누명으로 쫓겨나게 된다. 어머니조차 그녀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뺨을 친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고아와 같은 삶을 살아온 그녀는 모스크바에 있는 아기를 보러 가기 위해 애쓰지만 쉽지만은 않다. 로라 대신 글라라를 따라 나서다 도중에 차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치게 되고 부러진 다리를 이끌며 수용소로 돌아온다. 폭죽이 터지고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며 즐거워하는 성화가 지나가는 순간 빨간 피를 흘리며 니꼴라이의 품에서 죽어간다.

안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슬픈 기억을 가지고 알코올에 의지해 살아간다. 신앙심이 깊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와주려 애쓰지만 아무런 힘이 없기에 사람들의 고함에, 혹은 술을 얻기 위해 결국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등장 인물간의 긴장 관계를 해결하려 때로는 과장된 대사와 몸짓으로 연기하며 연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로라는 언제나 거짓으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감추고 싶어한다. 화재를 우려하는 발렌찌나의 눈을 피해 수용소에서 몰래 담배를 피운다. 항구를 전전하는 매춘부이지만 항상 자신을 배우라 소개하며 언젠가 서커스단의 공중 곡예사가 되기를 꿈꾼다. 수용소에서 만난 정신이상자 알렉산드르(샤샤)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알렉산드르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이지만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수용소에서 로라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구름 위를 걷고 있다고 믿는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누가 아버지인지 모를 마리아의 아이가 신의 아이라는 해석을 이끌어 낸다.

글라라는 전형적인 거리의 여자로 거친 말을 서슴없이 하고 술에 찌든 모습을 보여준다. 포주의 협박으로 로라를 모스크바로 데려가려고 찾아 왔지만 오히려 모스크바로 돌아갈 기회를 잃고 함께 수용소에 남게 된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전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에서 추방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며 축배를 들고 성화가 지나가는 순간에는 임시 수용소의 철창 앞으로 뛰어나가 철창 밖에 사람들에 못지 않게 환호를 하며 기뻐한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랑을 하며 아픔을 느끼며 꿈을 꾸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이 아닌 우리인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 바로 이 땅에서 같은 일이 최근까지도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도시 미관과 환경 정화를 이유로 수많은 빈민촌들이 뚜렷한 대책도 없이 강제 철거 되었고 가까이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개최 대책으로 거리 노점상 철거, 노숙자 강제 수용 등이 추진되었다. 이 사회에서 약자들은 사회로부터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귀찮은 존재로 취급 당한다. 주류 사회에 속해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똑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기에 이들을 보호하고 이런 소외된 계층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부조리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그냥 사라져 주기를 더 바라는지도 모른다.

주류 사회와 소외 계층간의 연결고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가느다란 실과 같다. 그래서 경찰인 니꼴라이와 창녀인 마리아의 사랑은 언제나 위태위태해 보이고 불안정해 보인다. 또한 소외 계층간의 연결 또한 로라와 알렉산드르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외부의 영향에 쉽게 깨어져버리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성서 속의 마리아는 신의 아이를 낳고 성가족을 이루며 널리 추앙받지만 창녀인 마리아는 빨간 피로 치마를 적시며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연극은 작고 희미하지만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연극의 마지막에 색종이가 뿌려지고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이쪽 세상과 단절된 높은 철창 담 저편에서도 수용소 사람들은 이 세상을 원망하거나 절망하기 보다는 손을 흔들며 같이 환호를 하며 함께 축제에 동참한다. 발렌치아는 종국에 니꼴라이와 마리아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성화가 지나가는 것을 좁은 창 틈이 아니라 넓은 곳에서 볼 수 있도록 수용소의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성화는 철창 밖의 사람이나 안의 사람이나 모두에게 희망인 것이다. 하늘의 별이나 음악에 있어 철창은 무의미 한 것처럼.

연극의 원제인 <Stars in the Morning Sky>는 새벽녘의 희미한 별빛을 말한다. 연극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그 별을 노래한다. 비록 내일이면 이 작은 불빛은 사라지지만 내일이 오기 위해서는 이들이 있어야 하며 이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며 내일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올림픽이 여름에 개최되는 것을 감안하면 연극의 시간적 배경 또한 여름일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 배우들의 의상은 여름 옷이라기 보다는 모두 무거워 보이는 겨울 옷차림이다. 특히 니꼴라이의 짙은 카키색의 경찰 제복은 차라리 겨울철의 군복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런 작은 오류가 눈의 거슬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어 보이는 연극 속 현실의 상황과 잘 어루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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