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4/27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 돈키호테로부터
베쓰야쿠 미노루
송선호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ISBN: 897986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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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얼마전 동명 연극의 공연이 있었다. 오늘 잠시 들른 서점에서 아쉽게 놓친 이 연극의 원작 희곡을 발견하고 주저없이 계산했다.

황야의 '이동식 간이 숙박업소'에 의사와 간호사, 목사가 찾아온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환자를 만들어 돈을 벌려는 의사와 사람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목사, 그리고 손님보다 먼저 모여드는 장사꾼들을 귀찮아 하는 여관 주인. 여관 주인의 딸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곳에 전혀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손님들이 등장한다. 늙은 기사 둘과 그들의 두 종. 이 두명의 늙은 기사는 물속에 독을 넣어 간호사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이 먹을 것은 남겨두지도 않은 채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어치워 버린다. 이어서 다시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여관 주인을 독살한 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상한 결투를 벌인다. 또다시 의사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목사 마저도 죽이고 만다. 늙은 종마저 여관 주인의 딸에게 죽도록 내버려 둔다. 이때 풍차가 돌기 시작한다. 기사는 젊은 종에게 도망치라고 하지만 젊은 종은 이를 거부하고 거인 브리아레오와 싸우겠다며 풍차에 돌진해 죽는다. 사는 일이 지겨운 두 기사는 차리리 여관집 딸에게 죽기를 기다리지만 궁지에 몰린 딸은 결국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제 두 노기사만 남아 있다. 사는 일에 질려 죽이는 일까지 질린 이 두 기사는 서로를 죽이려는 의지도 없이 누군가가 와서 자신들을 죽여주기를 기다린다. 시간은 겨울로 서서히 흘러가고 두 기사는 지구의 움직임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

'돈키호테로부터'라는 부제가 붙은 이 희곡은 돈키호테의 기사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지만 사실 돈키호테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싸우는 편력기사 돈키호테의 모습은 오간데 없다.
종1그것도 편력기사입니다. 그냥 기사와 편력기사의 다른 점은, 그냥 기사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상이 그대로지만, 편력기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세상이 손해를 입습니다. 때문에 편력기사는 언제나 세상을 편력해서 부정을 바로잡고 폐해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 로시난테는 벌써 잡아 먹어 버렸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도 기사가 아닌 그의 종 산초판사이다.
종1아니요, 저건 거인 브리아레오입니다. 마법사 프레스톤이 브리아레오와 싸우는 명예를 내게서 빼앗기 위해 풍차로 모습을 바꿔버린 겁니다. 가라고 해 주십시오. 가서 거인 브리아레오와 싸우고 오라고...(창을 든다)

이들은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 죽이는 일만 반복해서 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은 의사도 목사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의사와 사람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목사의 모습은 성공한 축에 속한다는 그들마저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비록 두 기사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심판을 받지만 정의는 아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목적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죽음은 그저 반복되는 상황일 뿐인 것이다.
기사2우리들도 특별히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게 아냐.
목사그런데, 왜 죽이는 겁니까?
기사2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이제 죽이는 것도 지쳐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지만 죽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누군가가 와서 그들을 죽여주기를 지구의 회전을 느끼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그저 기다릴 뿐이다.
기사2날 죽일 생각이 없군...
기사1없어
기사2왜?
기사1이제 질렸어.
기사2죽이는 게 말인가?
기사1사는 게... 그래서 사는 일에 질리니까 죽이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어.

기사2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어.
기사1어쩔 수 없지.
기사2언제까지지?
기사1저쪽에서 올 때까지지.
기사2뭐가...?
기사1우릴 죽일 상대가 말이야.
기사2올까...?
기사1기다리는 거지...

기사2지구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나?
기사1지구가...?
기사2그래...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이 지구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구.
기사1음...(확인하고)느껴지는군.
기사2지금이, 가을인가...?
기사1그래, 가을이야.
기사2그러면 우린 지금, 천천히 겨울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기사1아아, 겨울 쪽으로 말이지.
기사2느껴지지...?
기사1느껴져...

독으로 오염된 물과 치즈밖에 없는 상황에서 단지 '정말 약간 뭔가를 먹게 해주고, 정말 약간만 마시게 해주면 족하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목사의 모습에서 인간 삶의 딜레마를 느낀다.

두 노기사는 가만히 앉아 자신들을 죽이러 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란 결국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일 뿐인가...이 기다림의 모티브는 꼭 Samuel Beckett의 <En attendant Godot(고도를 기다리며)>와 흡사하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작가는 죽음이라는 탈출구를 제시하지만 너무나 절망적이다.
기사2걱정하지 않아도 돼. 단말마라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건 죽기 전에 조금 움직여 보고 싶어하는 거야. 살아 있는 게 아냐. 그냥, 움직이고 있을 뿐이니까...

1 comment:

Anonymous said...

오호 이게 대본이 나와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