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5/05

아가멤논 (The Ghost Sonanta)


아가멤논 (The Ghost Sonanta)
출연: 남명렬, 손진환, 안순동, 박정환, 박지아, 김동순, 신안진, 장영남, 김수진, 김광덕, 이준희, 박상우, 최우성, 이영윤
원작: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 아가멤논
각색, 연출: 미하일 마르마리노스
번역: 마은영
작곡: 드미트리스 카마로토스
무대디자인: 윤시중
의상디자인: 최수연
장소: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제작: 예술의전당

20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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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시작할 때부터 마칠 때까지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연극이다. 일반 극과 같이 편히 관객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군중이 되어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의 시민이 되어 아가멤논 왕의 개선을 축하도 하고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시신 앞에서 클레이템네스트라와 원로원과의 설전을 지켜보기도 한다.

연극은 무대 위가 아니라 토월극장 입구의 로비에서 시작한다. 중앙 홀 위에 흰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나 소리쳐 외치기 시작한다. 불행히도 소리가 울리는 데다 잘 보이지도 않아 다만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말을 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밖에 없다. 곧이어 객석으로 들어가지 않고 무대 뒤쪽의 출연자 출입구를 통해 곧장 무대로 올라간다. 무대 한 쪽에서 파는 붉은 색의 와인 한 잔을 사서 들고 무대를 둘러 보았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이 크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단 무대와 객석과의 거리도 거리지만 무대 위에 직접 올라가 보니 그 무대의 크기가 상당한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무대 위에는 대형 평면 거울 하나가 서 있고 무대 한켠에 카산드라가 죽은 물고기를 손에 얹고 서있다. 무대에서 객석을 쳐다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객석에는 아무도 없지만 낯설다. 저곳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노려보는 가운데 연기를 한다고 상상만 해봐도 배우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배우들은 그리스 시대의 토가를 하고 있지 않다. 무대 위에 있는 관객들과 혼동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트로이 전쟁을 마친 아가멤논 왕이 등장하고 관객들은 축하 행사의 군중이 된다. 배우들은 군중들 사이에 섞여 왕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기도 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윽고 흰 가면을 쓴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나타나 왕을 축하한다. 붉은 비단을 바닥에 깔고 왕에게 그 위를 지나 들어갈 것을 청하지만 아가멤논은 그런 사치는 신에게나 어울린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청에 아가멤논은 신을 벗고 그 위를 지나 간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붉은 비단이 아니다. 낡은 옷들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의...

극의 중심 사건은 아가멤논왕과 트로이 전쟁의 전리품으로 왕이 데리고 온 카산드라를 왕비 크리타임네스트라가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극이 배경이 되는 아트레우스가의 비극이나 트로이 전쟁에 대한 설명은 코러스들이 주로 서술한다. 가문의 선조 탄탈로스는 신들을 시험하려 자신의 아들을 죽여 신들의 식탁에 바쳤다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되고 아트레우스는 골육상쟁의 싸움속에서 동생의 두 아들을 죽여 요리를 만든 후 동생의 식탁에 내놓는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출정 중 여신의 노여움을 풀기위해 자신의 맏딸을 제물로 바친다.

왕과 함께 온 카산드라는 아가멤논과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를처럼 여러 감정상태를 보여준다. 분노, 냉소, 체념.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인지, 예견된 자신의 죽음때문인지 불분명하다. 이윽고 비명소리가 들리고 뒤쪽의 또 다른 무대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회전하는 원형의 무대 위에는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시체가 있고 무대 둘레를 따라 흰종이 위에 죽은 물고기들이 늘어서 있다. 두 시체 앞에서 코러스의 그리스 시민들은 왕의 죽음에 침통해 하기도 하고 왕비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흔들림없이 그들에게 응수하고 그들은 이에 힘없이 굴복하고 만다.


이 연극에서는 눈여겨 볼만한 몇 가지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가면과 죽은 물고기, 그리고 음악.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겉으로는 아가멤논에게 찬사를 늘어놓지만 그녀는 사실 그가 없는 동안 왕의 사촌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통하였고 자신의 딸을 죽인 왕에 대한 복수의 마음이 가득하다. 가면은 그녀가 진심을 숨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생선의 비린내와 피의 비린내. 처음에 무대위에 올라서서 카산드라의 손위에 있는 죽은 물고기를 보면서부터 비극의 시작을 예감할 수 있다. 회전무대 위에 늘어서 있는 죽은 물고기들은 눈앞에 놓여진 두 시체에서 흘러나온 흥건한 피이며 그 피의 비릿한 내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노래가 섞여 있고 코러스들은 돌림노래와 같이 말을 한다. 극의 중간에 계속해서 들리는 단음의 피아노의 저음들. 이런 요소들을 볼 때 이 연극에서 음악이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2 comments:

Anonymous said...

저는 마지막에 리얼리즘을 보았습니다. 물고기의 시체를 통해, 연기된 죽음이 아닌 진짜 죽음을 눈앞에 가져다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마신 포도주가 진짜인 것처럼...

nichtsein said...

네.그렇습니다.
연출가는 관객을 무대 위로 유도하고 피를 연상시키는 포도주와 죽은 물고기를 통해 과거의 사건이나 연기가 아니라 현재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느끼도록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